정초부터 알바거리가 들어왔다. 돈은 급하지 않기도 하고 언제나 급하기도 하고 - 그런 상황이다. 당장 먹고 살 돈은 있지만 얼마 안 가서 닳아 없어질 돈, 미래를 지탱할만한 액수는 되지 않는 돈.
앎바 내용이 어렵지 않아 보였고 무엇보다 2주에 걸쳐 4회만 출근하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부담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조건도 별로 묻지 않고 승낙했다. 그저 얼굴만 아는 정도지만, 아는 사람의 부탁이기도 해서. 보수는 교통비는 나올 거에요- 라는, 일을 맡긴 사람의 말대로, 당장 먹고 살 돈은 있지만 미래를 지탱할 만한 돈은 가지고 있지 않은 처지의 나에게는 실은 있으나 마나 한 액수였다. 그럼에도 선뜻 승낙한 것을 보면 나도 참 물러터졌다. 일을 맡긴 사람은 아마 입에 발린 소리였겠지만 완전 생명의 은인이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홀가분할 것이다.
나는 몇 시간 안 되어 곧바로 후회했다. 겨우 몇 번의 출근이긴 해도 전문성을 요하는 일인 데다 완전히 새로운 일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상당한 준비가 필요하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단기 알바이니만큼 직장에서 안심하고 앉아 있을 자리도 없고 돈을 벌긴 해야 하지만, 이제 '그런' 형태로 '그런' 액수의 돈을 벌어서는, 별로 소용도 없다. 어떤 일이든 처음이 힘드니까 처음 2주 적응 기간을 거쳐서 죽-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한 탕 크게 벌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알바나 계약직은, 나 자신을 마모시켜서 그 조직의 빈 부분을 잠시 메워주는 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몇 년이나 그렇게 일해왔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렇게 '느낀다'. 이런 방식의 일자리는 일하는 사람의 발전이나, 자아나, 인격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물론, 이 사회에서 그 사람이 어떻게 자리 잡고 살아갈지도 고려하지 않는다. 그에 대해서 회사가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것, 금전적인 부분에서도. 사람을 납땜용 납처럼, 잠깐 부품에 땜질용으로 쓰고 만다. 납땜을 하면 납은 그 부품에 붙어 있기라도 하지, 회사는 인간을 가차없이 버린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부품이라고 느끼는 순간은, 그것도 땜질용 임시 부품이라고 느끼는 순간에 모든 의욕을 잃는다.
아니, 실은 아직 젊고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요령도 없고 자존심만 센 나는, 그런 일도 의욕을 내서 열심히 한다. 그런 일이라도 열심히 한다. 그런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리고 느끼면서 그래도 의욕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 무언가를 희생해서라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 도대체 느낄 필요가 없는 자괴감이 느껴진다. 정말이지 나는 아무 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자괴감을 느껴야 한다. 정작 자괴감을 느껴야 할 사람들은, 땜질한 부품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희열을 느끼고 마음의 짐을 내려 놓는다. 나의 성실함은 이 불합리한 고용제도를 잘 돌아가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성실함은 잘못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이중의 자괴감을 느낀다. 이 점에 대해서 남에게 비난의 말을 듣고 싶지는 않지만, 그리고 남을 비난하지도 않겠지만,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느껴주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는 있다. 나처럼 오랫동안 일용직으로 일하면서, 초단기 알바를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 번 쯤 자신이 단지 '땜질용'이라는 자괴감을 느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실함'이 이 '땜질고용체계'를 공고히 한다는 의구심을. 나처럼 그것이 자괴감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더욱 좋겠지만. 계약직으로 일하는 것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또 아니지만. 자괴감 끝에 그다지 타인과도 사회와도 특히 조직과도 관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서 있는 길은, 모든 것을 되도록이면 거부하고 거절하는 것이다. 수행자들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살생만 하는 것처럼. 그렇지만 동시에 이런 부정적인 길이 답답하다.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을 하지 않는 삶.
나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리고 더 생각할 의지도 있는 것 같은데, 알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나라는 인간은 앎으로써 적어도 나 자신을 바꾸려고도 하는 인간이지만 앎으로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생각을 한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 생각하려고도, 느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고. 나도 전보다 훨씬 덜 느끼며 살아간다. 살아가기 위해, 하고 말하며.
처세 서적에 나와 있는 것들은,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아마도 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어릴 때부터. 그러나 이미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사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 계기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이것이 나의 아이다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래도 맛있는 것 먹고 쾌적한 집에 살고 싶다는 생각은 점점 커지고 부모님이 다른 이들에게 거리낌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직장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도 여전히 한다. 이것은, 경제적 의미에서 어른다운 부분일지도.
내가 아이인 것은 부끄럽지 않다. 계속 아이인 채로, 내가 납득해야만 한 발짝을 옮기는 식으로 살 수 있다면 속으로는 굉장히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삶일 것이다. 그러나 생산과 소비로써, 약간의 명예로써 사회의 전면에 나서고 싶다는 어른다운 욕망을 여전히 품고 있는 한, 그 자부심과 자괴감, 후회는 함께할 것이다. 부모에 대한 부채감과, 가난.
반대로 어른다운 삶을 본격적으로 추구한다면 나는 아마 계속 부끄러울 것이다.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일에 많은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누군가 나를 비판하거나 비난한다면 화부터 내는, 계속해서 자존감이 발갛게 부어 있는 어른이 될 지도 모른다. 타협한 스스로를 계속 위로하는 삶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아이일 때도, 어른일 때도, 나는 내가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을 한 적이 없다. 어른일 때도, 아이일 때도 그 일을 할 수가 없다. 선택지에 들어있지 않다. 하고 싶은 일은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일과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어, 언제나 발갛게 부어 있는 부분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이제 윤곽만 남아 흐릿해져, 실은 '하고 싶은 일'이라고 불러도 부른 것 같지가 않다. 그것에 '하고 싶은 일'이라는 이름표가 지금도 붙어 있기는 한 걸까.
분류없음 l 2010/01/03 23:13
앎바 내용이 어렵지 않아 보였고 무엇보다 2주에 걸쳐 4회만 출근하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부담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조건도 별로 묻지 않고 승낙했다. 그저 얼굴만 아는 정도지만, 아는 사람의 부탁이기도 해서. 보수는 교통비는 나올 거에요- 라는, 일을 맡긴 사람의 말대로, 당장 먹고 살 돈은 있지만 미래를 지탱할 만한 돈은 가지고 있지 않은 처지의 나에게는 실은 있으나 마나 한 액수였다. 그럼에도 선뜻 승낙한 것을 보면 나도 참 물러터졌다. 일을 맡긴 사람은 아마 입에 발린 소리였겠지만 완전 생명의 은인이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홀가분할 것이다.
나는 몇 시간 안 되어 곧바로 후회했다. 겨우 몇 번의 출근이긴 해도 전문성을 요하는 일인 데다 완전히 새로운 일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상당한 준비가 필요하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단기 알바이니만큼 직장에서 안심하고 앉아 있을 자리도 없고 돈을 벌긴 해야 하지만, 이제 '그런' 형태로 '그런' 액수의 돈을 벌어서는, 별로 소용도 없다. 어떤 일이든 처음이 힘드니까 처음 2주 적응 기간을 거쳐서 죽-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한 탕 크게 벌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알바나 계약직은, 나 자신을 마모시켜서 그 조직의 빈 부분을 잠시 메워주는 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몇 년이나 그렇게 일해왔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렇게 '느낀다'. 이런 방식의 일자리는 일하는 사람의 발전이나, 자아나, 인격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물론, 이 사회에서 그 사람이 어떻게 자리 잡고 살아갈지도 고려하지 않는다. 그에 대해서 회사가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것, 금전적인 부분에서도. 사람을 납땜용 납처럼, 잠깐 부품에 땜질용으로 쓰고 만다. 납땜을 하면 납은 그 부품에 붙어 있기라도 하지, 회사는 인간을 가차없이 버린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부품이라고 느끼는 순간은, 그것도 땜질용 임시 부품이라고 느끼는 순간에 모든 의욕을 잃는다.
아니, 실은 아직 젊고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요령도 없고 자존심만 센 나는, 그런 일도 의욕을 내서 열심히 한다. 그런 일이라도 열심히 한다. 그런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리고 느끼면서 그래도 의욕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 무언가를 희생해서라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 도대체 느낄 필요가 없는 자괴감이 느껴진다. 정말이지 나는 아무 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자괴감을 느껴야 한다. 정작 자괴감을 느껴야 할 사람들은, 땜질한 부품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희열을 느끼고 마음의 짐을 내려 놓는다. 나의 성실함은 이 불합리한 고용제도를 잘 돌아가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성실함은 잘못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이중의 자괴감을 느낀다. 이 점에 대해서 남에게 비난의 말을 듣고 싶지는 않지만, 그리고 남을 비난하지도 않겠지만,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느껴주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는 있다. 나처럼 오랫동안 일용직으로 일하면서, 초단기 알바를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 번 쯤 자신이 단지 '땜질용'이라는 자괴감을 느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실함'이 이 '땜질고용체계'를 공고히 한다는 의구심을. 나처럼 그것이 자괴감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더욱 좋겠지만. 계약직으로 일하는 것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또 아니지만. 자괴감 끝에 그다지 타인과도 사회와도 특히 조직과도 관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서 있는 길은, 모든 것을 되도록이면 거부하고 거절하는 것이다. 수행자들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살생만 하는 것처럼. 그렇지만 동시에 이런 부정적인 길이 답답하다.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을 하지 않는 삶.
나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리고 더 생각할 의지도 있는 것 같은데, 알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나라는 인간은 앎으로써 적어도 나 자신을 바꾸려고도 하는 인간이지만 앎으로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생각을 한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 생각하려고도, 느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고. 나도 전보다 훨씬 덜 느끼며 살아간다. 살아가기 위해, 하고 말하며.
처세 서적에 나와 있는 것들은,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아마도 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어릴 때부터. 그러나 이미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사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 계기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이것이 나의 아이다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래도 맛있는 것 먹고 쾌적한 집에 살고 싶다는 생각은 점점 커지고 부모님이 다른 이들에게 거리낌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직장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도 여전히 한다. 이것은, 경제적 의미에서 어른다운 부분일지도.
내가 아이인 것은 부끄럽지 않다. 계속 아이인 채로, 내가 납득해야만 한 발짝을 옮기는 식으로 살 수 있다면 속으로는 굉장히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삶일 것이다. 그러나 생산과 소비로써, 약간의 명예로써 사회의 전면에 나서고 싶다는 어른다운 욕망을 여전히 품고 있는 한, 그 자부심과 자괴감, 후회는 함께할 것이다. 부모에 대한 부채감과, 가난.
반대로 어른다운 삶을 본격적으로 추구한다면 나는 아마 계속 부끄러울 것이다.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일에 많은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누군가 나를 비판하거나 비난한다면 화부터 내는, 계속해서 자존감이 발갛게 부어 있는 어른이 될 지도 모른다. 타협한 스스로를 계속 위로하는 삶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아이일 때도, 어른일 때도, 나는 내가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을 한 적이 없다. 어른일 때도, 아이일 때도 그 일을 할 수가 없다. 선택지에 들어있지 않다. 하고 싶은 일은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일과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어, 언제나 발갛게 부어 있는 부분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이제 윤곽만 남아 흐릿해져, 실은 '하고 싶은 일'이라고 불러도 부른 것 같지가 않다. 그것에 '하고 싶은 일'이라는 이름표가 지금도 붙어 있기는 한 걸까.

